금호 초등학교가 개교한 날짜는 1958. 2월 말경이며 내가 6학년되기 직전의 해이다.
내가 '금호초등학교 동창회' 까페에 가입을 하여 여러 후배들과 금호동 얘기를 하게 되어 매우 기쁘고 가슴 설레이기도 합니다.
내가 금호 초등학교를 졸업하게된 과정을은 아래와 같다.
나는 서울 토박이로서 중구 쌍림동(퇴계로5가 근처)에서 출생하였으나 성장기에는 금호동(논꼴)에서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무렵 우리 동네 애들은 모두 청구 초등학교(당시:국민학교)에 입학하였는데 2~3년 후에는 우리 동네 애들이 청구 초등학교 보다 조금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무학 초등학교에 배정을 받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1953년도 4월은 한국전이 끝나지 않은 때였기에 청구 초등학교 교정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청구초등학교는 인근 장충초등학교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즉 한개의 교정에 장충초등학교와 청구 초등학교 2개교가 각기 다른 학교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해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한국전쟁이 중지 되어 미군이 철수 하였으며 이듬해인 1954년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장충초등학교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현재의 청구 초등학교로 옮겨 공부를 하게 되었다.
좁기만 했던 장충 교정에 비해 청구 초등학교는 넓고 푸른 동산(靑邱:푸른 언덕)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어린이들이 뛰어 놀기 좋을뿐만 아니라 금호동에서 장충초등학교까지 걸어 다녔던 등교 거리가 훨씬 짧아 졌으니 이 또한 좋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세
월은 흘러 어느덧 5학년 고학년이 되면서 청구 초등학교에 전학생(이때 전학하는 학생은 대개 피난 갔다가 돌아오는 학생 및 지방에서 상경하는 학생)이 늘어 나자 입학 당시 4개 학급이었는데 7개 학급이 되었고
1957년 5학년이 되었을때는 8학급으로 증편되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새로 증편한 8반 학생 전원을 금호동에 거주하는 학생들로 반 편성을 하였다.
그리고 다른반은 남녀 구별해서 반 편성을 했음에도 유독 8반은 남녀 혼성반으로 편성이 된 것이다.
요즘 같으면 혼성 반을 선호하고 좋아했겠지만 그 당시에는 왜 그리도 혼성 편성된 반에서 공부 하는 것이 부끄러웠던지!
5학년 8반 담임 선생님은 새로 전입하신 분이었는데 학기초 학생들의 아주 작은 잘못이 발견되면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제 생각하니 금호동 사는 학생들은 성질이 거칠고 다루기 힘드니깐 처음부터 기강을 잡으라는 언질을 누구로부터 받기라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분명히 학비를 잘 내지 않는 가난한 학생들의 대부분이 금호동에 거주하고 있었기 이들을 특별 관리하려는 차원에서 금호동 반을 편성 한 것이 분명했다.
그 당시 체벌을 당한데 대해 불만은 없다.
오히려 그때 그 선생님을 지금 만난다면 큰절 올리고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고 꼭 뵙고 큰 절 올리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5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 신학기로 접어들기 직전에 금호초등학교가 개교하는데 전학 희망자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재학생중 금호동 거주자는 전원 금호초교로 전학을 가야 하지만 5학년생(6학년 진학 예정, 1년후 졸업)은 희망자로 한정했다.
나는 주저 없이 금호 전학을 신청하였다.
나 외에 20여명의 학생이 신청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다른 애들은 중학교 입학 시험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전학 신청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1958년 2월 말경 그 당시 금호동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유력 정치인(故 임흥순:국회의원, 서울시장 역임)이 맨 앞장에 서서 금호초등학교 전학생 전원이 4열로 줄을 서서 청구초등학교를 출발 하여 금호동 고갯길을 넘어 현재의 금호초등학교에 도착하여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금호 초등학교 건물은 군용 콘세트(깡통 반쪽 형태) 건물 3동에 24학급 이었으나 6학년은 1학급 뿐이었다.
그래서 1회 졸업생 숫자가 무척 적다.
내가 보관하고 있는 1회 졸업생 명단은 아래와 같다.